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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와 소음 사이 : 충돌 혹은 대화


글 에밀리 은진 김 emilie@dfparis.com

photo by Joon oldpic312@gmail.com



비범한 소리들 son extraordinaire, 그것은 소리가 또 다른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이것은 소리가 사회적, 미학적, 윤리적 체계의 규범 내부나 외부에 있는 것을 구분하는 것이 소리 자체의 속성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는 방식에 있다는 뜻이며, 또한 소리를 어떠한 임의의 잣대 critères arbitraires 를 기준으로 ‘소리’와 ‘소음'으로 구분하는 태도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폴 헤거티 Paul hegarty 는 '소음' 혹은 '음악'이 대상으로서 정의되기보다는 청취방식에 의해 규정되는 것으로 설명한다. 따라서 객관적인 소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1] 소음은 그것의 본질적 속성이 아니라 시스템과의 관계에서 결정되기 때문이다[2]. 이 관계성은 더욱 엄밀히 말하자면 차별적 관계성이다. 즉, 소음은 '그것이 무엇인가'라는 정의 보다는 ‘그것은 무엇이 아닌가(what it is not)'이라는 부정형으로만 존재한다[3]. 이 차별은 소리의 세계에서, 그리고 소리를 인식하는 사람들이 구성한 사회 시스템 안에서 이미 확립된 규범의 틀에서 소음을 ‘‘타자'로 배제함을 의미한다.

‘소음’이라는 말에는 그것에 선행하는 가치판단이 포함된다. 원치않는 소리, 맥락에 어긋난 소리는 소음으로 구분된다. 미셸 시옹 Michel Chion의 분석에 따르면 특히 프랑스어권에서는 음악적인 소리나 음성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경우에는 소리son 이라는 단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소리’에 비해 ‘소음’이라는 단어는 부정적이고 경멸적인 맥락에서 더 자주 사용되는데 예를들어 영어권에서 아이들에게 ‘조용히 해라' 라고 주의를 준다면, 같은 상황에서 프랑스어권에서는 ‘소음을 내지 말아라'라고 한다. 이러한 언어의 습관은 ‘소음’을 공격, 방해의 의미로 이해하는 사회 문화적 인식을 드러낸다[4]. 그런데 이 소음에 대한 규정은 상대적이어서 만약 최고의 연주자에 의해 훌륭하게 녹음된 음악소리도 그것이 부적절한 맥락에서 재생된다면 소음이 될 수 있다. 조용한 기차에서 옆 사람의 이어폰으로부터 새어나오는 희미한 음악소리는 타자로서 나의 영역을 침투한다. 내 공간의 적막을 깨는 타자의 소리는 그 자체로 폭력적이다. 사회학자로서 자크 아탈리 Jacques Attali 는 소음에 대한 부정적 의미부여를 종교적 아이디어로부터 설명한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구약성서에서 인간이 처음으로 듣게 된 타자의 소음은 원죄를 짓고 난 후 듣게 된 신의 발걸음 소리이다[5]. 이 최초의 소음에 대한 인식은 타인의 힘에 의한 죽음에 대한 원초적 공포와 두려움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타자의 소리라 할지라도 자유롭게 제어할 수 있는 경우에는 그것이 소음으로 여겨지지 않을 가능성이 조금 더 커진다. 그래서 결국 소음의 문제는 타자와의 권력관계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자크 아탈리는 음악을 통한 위협적인 소음(즉, 폭력과 죽음의 위협)과의 소통(종교와 제의적 상황에서 기도)의 기능을 설명한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소음은 폭력이고 살인의 유사물이다. 음악은 질서 안에 통합된 소음의 승화이고, 폭력성의 배출구이며 정당화 된 살인인 희생 제물의 유사물이다[6]. 그런데 소음과 음악은 절대적 기준으로 완전히 구분되지 않는다. 소음이 어떠한 확립된 질서와 시스템 안으로 들어오면 그것은 음악으로 탈바꿈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폭력과 파괴, 죽음의 공포를 의미하는 소음이 음악의 형태로 용인된다면 그것의 부정성은 사라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 때의 통합은 하나가 다른 하나를 흡수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 고유성을 유지한 양자 사이의 긴장이 창출하는 제3의 효과를 지향하는 헤겔적 변증법이다. 소리와 소음의 변증법적 관계를 자크 아탈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소음과 함께 무질서가 태어나며 그 반대는 세계이다. 음악과 함께 권력이 태어나며 그 반대는 파괴이다. 소음은 삶의 코드, 인간 사이의 관계로 읽힐 수 있다... 소음이 소리가 되었을 때 그것은 목적과 권력의 근원, 그 꿈-음악의 근원이 된다. 그것은 미학의 진보적 합리화의 핵심이며, 그것은 남아있는 비합리성을 위한 안식처이다.[7]

            여기서 질서안의 소음은 그 부정성을 상실한다는 아탈리의 이론에 주목해 보자. 예를들어 아프리카계 아메리칸의 불평과 저항으로부터 시작된 재즈는 아탈리적 의미에서 볼 때, 그것이 탄생한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서 질서를 방해하고 위협하는 소음에 속할 수 있다[8]. 때문에 극단적인 예로, 나치 독일은 1938년 뒤셀도르프에서 ‘타락한 음악 전시회'를 개최하면서 재즈를 전면적으로 거부하였다[9]. 이에 반해 나치가 신봉하고 치켜세운 음악은 지배층의 권위와 폭력을 정당화하는 바그너의 음악이었다[10].


1938년 뒤셀도르프 '타락한 음악 전시회'의 포스터

그런데 재즈는 피지배 계층의 소외와 사회적 배제를 표현하면서도 진화와 보급 과정에서는 지배계층의 관습과 언어를 차용한다. 아프리카계 노예들의 한탄을 표현하는 문화이면서 유럽식 악기 구성을 갖추고, 질서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하면서도 그 메세지를 전달하기 위해 또 다른 질서와 형식, 표준화된 연주관행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역사상 최초로 녹음되어 시장에 발매된 재즈 앨범[11]은 백인들로만 구성된 오리지날 딕시랜드 자스 밴드 Original Dixieland Jass Band 에 의해 발매되었다는 사실은 재즈가 필연적으로 지배층의 질서 안으로 통합되어 전파되어갔음을 알수 있게한다. 피지배층의 문화에 뿌리를 둔 재즈는 20세기 초 미국과 유럽의 제국주의적 경제망을 이용해 초국가적으로 확장된 음반사업의 물결을 타고 지배층의 권력에 통합되어 전세계로 공급된다. 이것은 재즈가 백인 주류시장에 영토화되는 것으로 볼 수 있겠으나, 결국에 재즈는 서양 악기를 사용하면서도 지배층의 권력을 대변하는 연주가 아닌 전혀 다른 노선[12]을 선택하여 스스로를 재영토화[13]하는 것으로 저항의 정신을 이어간다.


루이 암스트롱 Louis Amrstrong, Heebie Jeebie,1926

이난영, '목포의 눈물', 1936

이 무렵에 루이 암스트롱이 처음으로 시도한 것으로 알려진 독특한 재즈적 기법인 스캣은 의미없는 의성어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면서도 스스로를 이방인으로 타자화하는 방식으로 의미로부터의 해방을 선언한 것이다. 이 목소리는 소리로서는 들리지만 의미로서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배제된 계급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이다. 아탈리가 음악을 예언이라고 묘사한대로[14], 1926년 루이암스트롱이 '히비지비 Heebee Jibee' 를 통해 처음 스캣을 선보인 지 불과 13년만에 이 스캣 기법은 제국주의적 문화사업의 물결을 타고 태평양을 건너 머나먼 아시아에 당도, 그 당시 일본의 식민지 아래에 있던 한국의 대중가요[15]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1936년 발표된 한국의 대중 가수 이난영의 앨범에 수록된 ‘바다의 꿈’과 같은 블루스 형식의 곡에는 암스트롱의 것과 같은 스캣이 녹아들어 있다. 이 후로도 재즈는 혁신을 거듭하며 재즈 내부에서도 진정한 재즈란 무엇인가-이것은 진정한 해방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 에 대한 끊임없는 담론이 형성되어왔고, 1950년대 말에는 관습화된 재즈에 대항하기 위한 프리재즈가 탄생하기에 이른다. 이 일련의 과정은 재즈라는 독특한 장르가 지닌 해체적 특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데, 즉흥연주는 재즈적 언어를 가지고 형식을 창조하면서도 그 규칙에 종속되지는 않는 점에서 구조와 그 현상이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프리재즈 연주자들 마저도 음악(그리고 음악의 의도)이 가지고 있는 권위에 대한 저항의 표현으로 소음(또는 의도되지 않은 음들)을 음악적 재료로 삼지만, 음악의 질서 안으로 편입된 소음들은 자유와 구속이라는 이중성으로 인한 새로운 갈등을 겪는다[16]. 질서가 아닌 저항의 유사(즉, 소음의 특성)이라는 고유성을 그대로 지닌 채로 음악적 규범의 틀 안으로 통합되는 재즈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마치 랑시에르 Jacques Rancière 의 ‘프롤레타리아의 밤 La nuit des prolétaires’ 에서 노동자가 그들의 집단을 대표하여 집단적 담론의 주체로 등장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노동자처럼 살면서 부르주아처럼 말하는 이중적 인식이 필요한 것처럼, 어쩌면 기존 클래식적 음악 관습에 스스로를 ‘배제된 소리'로 타자화하는 방식을 취해야만 하는 재즈연주에서, 완전한 해방을 추구하기란 유토피아적 불가능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도 볼수 있다. 그러나 재즈는 지배층의 언어를 모방하는 것으로 자신의 언어를 ‘들리는' 소리가 되게 할 수 밖에 없는 배제된 계급의 숙명적인 내적 갈등이 있기에 끝없이[17] 저항하는 음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증법적 통합은 다시 말해 조르주 바타유 Georges Bataille 가 주장하고 있는 새로운 형태의 비생산적 소비 양식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바타유는 폭력을 이성 세계 너머에 있는 인간의 또 다른 본성으로 보고 이 폭력적 충동이 과잉이 되었을 때 그것이 파국으로 발현되지 않도록 안전하게 소비하는 ‘비생산적 소비’의 개념을 제시한다. 폴 헤거티는 소리의 세계에서 노이즈를 바타유적 의미에서의 과잉-희생에 이르는 과잉으로 해석하고 있다[18]. 바타유적 일반경제[19]에서 과잉의 몫은 순수하게 소진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비극적 결과를 초래한다. 그가 ‘저주받은 몫 La Part maudite’으로 명명하고 있는 낭비와 탕진의 영역은 이성과 합리성의 세계에서 유용성의 가치에 갇힌 인간을 합리성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는 기능을 한다[20].

같은 의미에서 구체음악 작곡가 피에르 셰페르 Pierre Schaeffer 가 주창한 ‘감소된 청취 écoute réduite’[21]는 폭력과 저항을 의미하는 소음이 질서 안으로 통합되어 온전한 소리로 안전하게 소비 - 바타유적 의미로 순수하게 소진- 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감소된 청취는 소리의 출처, 그것의 의미와 그것의 가치 판단으로부터 해방된 ‘소리 객체' 그 자체를 듣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청취에 가장 필요한 것은 청취자의 의지이다[22]. 결국 소음의 해방은 능동적 듣기를 통해 소음을 포함한 모든 소리의 가치를 청취자 스스로가 재발견하는 것이다. 능동적 듣기를 통한 소음의 재발견은 존 케이지 John Cage 에 의해 더욱 확장된다. 그는 환경의 일부로서 존재하는 노이즈가 인위적인 악음보다 더욱 음악적일 수 있음을 역설한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우리가 듣는 것은 대부분 노이즈이다. 우리가 귀 기울이지 않을 때, 노이즈는 우리에게 방해가 되지만, 귀기울여 보면 [그 역시] 매력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시간 당 50마일로 달리는 트럭 소리, 정거장 사이의 잡음, 빗소리...  우리는 이 소리를 붙잡아 사운드 효과로서가 아니라 음악을 만들어내는 수단으로 사용되도록 컨트롤하기를 원한다.[23]

존 케이지의 “거실 음악 Living Room Music (1940)”은 일상의 소음을 배경효과음이 아니라 작곡의 주된 재료로 채택한 작품이다. 잡지, 책, 창틀과 바닥과 같은 일상적인 사물을 타악기연주자들이 연주한다. 이 음악에서 청중이 듣게 되는 것은 일상의 기능과 유용성의 범주를 벗어난 사물들의 소리들이다. 이 ‘소음’의 특성을 가진 소리는 일상의 ‘질서' ‘평범한 소리'에 저항하는 ‘비범한 소리들 sons extraordinaires' 이다. 이 비범함은 이 사물이 본래의 자리에서 기능하고 있을 때에는 배제되었던 소음이었지만 음악의 형식으로 연주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청자의 인식 안에 질서에 대한 저항이라는 미학적 의미를 획득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앞서 기술한 소음과 소리의 변증법적 충돌이라 할 수 있겠다.

        음악의 창작에서 소음에 대한 본격적인 도입이 있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산업혁명 이후, 공장에서 돌아가는 기계의 소리, 내연기관의 엔진소리 등 산업화로 인해 일상생활에 새로운 소리들이 등장하게 되면서부터이다. 미래파 화가이자 실험음악가인 루이지 루솔로 Luigi Russolo(1885-1945)는 산업화가 야기한 이러한 소리환경의 변화에 따라 현대인에게 새로운 청각자극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24]. 그는 소음을 주체로 하는 음악을 통해 삶의 연속으로서의 예술을 추구했다. 삶 가운데 예술이 있고 예술은 삶의 환경을 담는 것이다. 아래는 루이지 루솔로가 1913년에 작곡가 발릴라 프라텔라에게 보내는 편지의 일부이다.

"점점 더 소리의 영역을 확장하고 풍부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이것은 우리 감성의 필요에 부응하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모든 현대 천재 작곡가들이 가장 복잡한 불협화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순수한 소리에서 멀어지면서, 그들은 거의 소리-소음에 이르게 된다. 이 필요와 경향은 소리와 소음의 결합 및 소리를 소음으로 대체함으로써만 완전히 만족될 수 있다."[25].

         더 나아가 동시대 현실의 반영으로서의 음악을 추구했던 작곡가 에드가 바레즈 Edgard Varèse는 과거의 악기가 시대를 반영하지 못한다고 생각했고[26], 새로운 음향을 표현할 새로운 악기의 개발을 주장하면서 동시대의 소리환경을 예술세계에 통합하려고 시도했다[27]. 또한 악보 보다는 음향을 음악의 본질로 생각했던 그는 정형적인 방식의 쓰기를 경멸했다.[28] 실제 공장에서 녹음된 소리를 사용한 그의 작품 ‘사막 Déserts’ 의 1954년 연주는 20세기의 가장 큰 스캔들 중 하나였다.이 작품이 새로움을 넘어서 스캔들이었던 이유는, 그가 음악을 통해 반영한 이른바 ‘소음'이 불러일으킨 거부감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거부감은 앞서 언급한대로 소음 자체의 내재적 특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소리를 해석하는 사회 문화적 관습과 심리적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특히 어떤 소리를 일상적으로 직면하지 않는 계층일수록 이 거부감은 더욱 커질 수 있다. 파리는 1950년대에도 아직 부분적으로만 산업화 된 도시였던 까닭에 공장의 소음은 당시의 대중, 정확히는 노동자 계층이 아닌 파리의 관객들에게 익숙하지 않았다[29]. 특정한 소리자극에 대한 감각이 사회적 계층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것은, 랑시에르의 말대로, 어떤 계급에게는 유효한 소리가 또 다른 계급에게는 무효한 것으로 배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동의 소음으로부터 ‘보호받는' 어떠한 사회계층에게 소음은 들리지만 들리지 않는 소리인 것이다[30].

우리가 모두 동의할 수 있는 하나의 진실이 있다면 음악이 있기 이전에 먼저 자연의 소리가 있었다는 것이다. 세상에 질서가 있기 전에 혼돈, 공허 그리고 백색 잡음이 있었다. 음악이 차이와 질서를 만들면서 권력을 독점하기 이전에도 자연은 고유한 울림으로 소리내고 있었다. 소음과 소리는 때로 충돌하지만 음악적 청취 안에서 이 충돌은 청자의 인식과의 대화를 시도한다. 이 대화는 청자의 현실의 삶과 기억, 상상을 넘나들며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대화이다. 영화 ‘일 포스티노 Il Postino, 1994’ 에서 우편 배달부 마리오가 시인 네루다에게 섬 마을의 파도소리, 바람소리, 성당 종소리, 아기의 심장뛰는 소리를 녹음하여 편지로 보내는 장면은 소리가 삶을 어떻게 담고 그것이 청취자에게 어떻게 말을 거는 것인지를 곰곰히 생각해보게 한다.     


[1] 물론 예술과 인문학적 분야를 떠나서 소음에 대한 객관적인 정의를 내리는 경우도 있다. 전자 공학 분야에서 소음은 신호체계를 방해하는 요소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R. Murray Schafer, Soundscape the Tuning of the World (Rochester: Destiny Books,1994), p. 182) 또한 19세기 독일의 물리학자 헬름홀츠는 소음에 대해 주기적인 진동(periodic vibrations)으로 구성된 “음악적 소리”(musical sound, or musical tone)와 대조되는 개념으로서, 비주기적인 진동(non-periodic vibrations)으로 구성된 “비음악적인 소리”(nonmusical sound)라는 표현을 하였다.(Hermann Helmholtz, On the Sensations of Tone: As Physiological Basis for the Theory of Music (Bristol: Thoemmes Press, 1998), pp. 11-13) 그러나 이러한 정의 마저도 ‘방해' 또는 ’비음악적'으로 규정된다는 점에서 사회적으로 정당화된 소리의 부정이라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폴 헤거티의 주장과 크게 멀어지지 않는다.

[2] 사회학자 자크 아탈리 역시 소음이 그 내제적 속성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소음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이 포함된 시스템과의 관계-발신자 , 전송자, 수신자-에서만 존재한다."

(Le bruit n'existe donc pas en lui-même, mais par rapport au système ou il s'inscrit : émetteur, transmetteur, récepteur)

Jacque Attali, BRUITS essai sur l'économie politique de la musique,1977,Presse Universitaires de france,p.54 

[3] Hegarty Paul, Noise/Music: A History,1967, The Continuum International Publishing Group (2007),

 p.3-5

[4] Michel Chion, Sound, An Acoulogical Treatise, Duke university press,2016,p.71

[5]  Jacque Attali, BRUITS essai sur l'économie politique de la musique,1977,Presse Universitaires de france,pp.54-56

[6] Ibid,pp.52-53

[7] Ibid,p.13

[8] Hegarty Paul, Noise/Music: A History,1967, The Continuum International Publishing Group (2007),

 pp.44-48

[9] Schnapper, Laure. « La musique « dégénérée » sous l'Allemagne nazie », Raisons politiques, vol. no 14, no. 2, 2004, pp. 157-177.

[10]Adorno a écrit en 1938, « l’antisémitisme wagnérien rassemble en lui tous les ingrédients de l’antisémitisme ultérieur » (Theodor Adorno, Essai sur Wagner, trad. de l’all. par Hans Hildenbrand et Alex Lindenberg, Gallimard, 1966, p. 27.)

[11]Original Dixieland Jass Band, Livery Stable Blues, enrégistré en 1917

[12] 저항을 기본으로하는 흑인 창작의 총체로서 1930년대 이후의 재즈는 단순히 음악 이상의 문화현상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재즈스러운’ 대중의 옷차림, 언어, 태도를 유행시켰고 193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미국과 유럽의 많은 영화제작자들은 재즈가 삽입된 누아르 필름을 창작하였다. 재즈는 흑인 문학에도 깊은 연관을 갖고 있는데 예를 들어 Ralph Ellison의 《Invisible Man》 (1952)은 재즈적 소설로 간주된다. Louis Armstrong의 "What Did I Do (To Be So Black and Blue)" 은 《Invisible Man》의 시작 부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이 소설의 주요 테마 중 하나이다. 소설의 형식 면에서도 즉흥적인 느낌의 글쓰기 스타일과 기이하게 틀어진 방식의 환각같은 서사구조는 재즈 연주의 그것과 유사성을 갖는다. 또한 재즈 스캣과 유사한 언어로 즉흥적인 시를 지었던  Bob Kaufman(1925-1986)과 같은 시인이 나타나기도 했다.

[13] 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영토화는 자신만의 영토를 창조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영토 배치는 영토화, 탈영토화, 재영토화라는 세 가지 운동과 교차한다.

« Tout agencement est d’abord territorial. La première règle concrète des agencements, c’est de découvrir la territorialité qu’ils enveloppent, car il y en a toujours une : dans leur poubelle ou sur leur banc, les personnages de Beckett se font un territoire. Découvrir des agencements territoriaux de quelqu’un, homme ou animal : “chez moi” »(G. Deleuze, F. Guattari,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2, Mille plateaux, Paris, Minuit, 1980, p. 629)

[14] ATTALI Bruits p23

[15] 유선영.(2000).육체의 근대화: 할리우드 모더니티의 각인.문화과학,24(),233-250.

[16] Ibid,p.48

[17]재즈는 끝없이 변형을 거듭하면서  자신을 구조화하는 코드를 탈주한다. 이와같은 반복운동을 들뢰즈와 과타리는 이러한 음악을 변이의 다양체(muliplicités à transformation)라고 설명하고 있다:

음악은 많은 “변형적 다양성”처럼 자신의 탈주선을 통과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으며 심지어 그것을 구조화하거나 구조화하는 자체 코드를 뒤집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음악적 형식이 단절과 증식 속에서도 잡초, 뿌리줄기에 비유되는 이유이다. (La musique n'a pas cessé de faire passer ses lignes de fuite, comme autant de « multiplicités à transformation », même en renversant ses propres codes qui la structurent ou l'arbrifient ; ce pourquoi la forme musicale, jusque dans ses ruptures et proliférations, est comparable à de la mauvaise herbe, un rhizome. (G.DELEUZE, F.GUATTARI, Mille Plateaux,LES ÉDITIONS DE MINUIT,1980.p.19)

[18] Ibid,p.155

[19] 조르쥬 바타유가 말하는 ‘일반경제’는 우리 시대의 경제학이 말하는 경제-그의 표현에는 부의 생산과 축적에만 관심이 제한된 경제’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고 오히려 인간 삶의 총체적 양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지구상의 유기체들의 생물학적 메커니즘을 전체적인 시야에서 보면,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는 과잉 생산되는 에너지를 소진시키는 것이다. 바타유는 먹기, 죽음, 성행위를 생명체가 과잉된 에너지를 소진시키는 방법으로 보고있다.

[20]Georges Bataille, La Part maudite (1949). Œuvres complètes, tome VII, Gallimard, 1976, p. 63.

[21] Pierre Schaeffer, De l'expérience musicale à l'expérience humaine, 1971,p.70.

[22] Grosléziat, Chantal. « Une écoute concrète », , Bébés chasseurs de sons. Premières sensations et créations sonores, sous la direction de Grosléziat Chantal. Érès, 2004, pp. 141-150.

[23] 존케이지. 사일런스 p.3

[24] 루이지 루솔로는 작곡가 프란텔라(Francesco Balilla Prantella, 1880-1955)에게 보내는 서한을 통해  음악의 진보과정이 음악적 소음의 탄생을 준비하였다고 주장한다.

[25] Luigi Russolo, L’Art des Bruits (1913),Edition Allia,Paris 2009, p.26

[26] 바레즈는 현악기가 자신의 시대를 반영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Mathieu, Julien. « Un mythe fondateur de la musique contemporaine : le « scandale » provoqué en 1954 par la création de Déserts d'Edgar Varèse », Revue d’histoire moderne & contemporaine, vol. no51-1, no. 1, 2004, p.140

[27] « Je rêve les instruments obéissants à la pensée – et qui avec l’apport d’une floraison de timbres insoupçonnés se prêtent aux exigences qu’il me plaira de leur imposer et se plient à l’exigence de mon rythme intérieur » E.Varèse, Écrits,1983, p.24

[28] Guillot, Matthieu. « Musique », Études, vol. 403, no. 9, 2005, pp. 247-250.

[29] Mathieu, Julien. « Un mythe fondateur de la musique contemporaine : le « scandale » provoqué en 1954 par la création de Déserts d'Edgar Varèse », Revue d’histoire moderne & contemporaine, vol. no51-1, no. 1, 2004, p.147

[30] 랑시에르는 계층에 따른 감각의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세계를 인식하는 신체적 자각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RAMOND Charle, Jacques Rancière, L’égalité des intelligences, Belin,2019, 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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