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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노래하는 마음 - J.S 바흐 바이올린 파르티타 3번 BWV 1006 프렐류드

글 에밀리 은진 김

 

  완전한 미지의 세계 앞에서 우리가 이미 알고 있거나 익숙한 것을 연결지어 보는 이유는 아마도 그 막연함에서 오는 두려움을 극복해보려는 시도가 아닐까 싶다. 그러니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머나먼 우주 속 낯선 별들 사이에서 익숙한 형상들을 찾아보는 것이다. 반짝이는 별들을 선으로 이어보면 그 곳에 사자, 양, 물고기 같은 친숙한 동물들이 나타난다. 이 익숙한 형상들은 어둔 밤 사막의 여행자에게 길잡이가 되어준다. 이것은 인류가 별자리를 만들어내게 된 이야기이다.

 

  낭만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찬물을 끼얹는 말이 될 수 있겠지만, 나란히 빛나는 것처럼 보이는 별들 사이의 거리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멀다. 천문학자 칼 세이건은 “별들 사이의 아득한 거리에는 신의 배려가 깃들어 있는 듯하다[1]”고 말한다. 단순한 시적 감상이 아니다. 별과 별 사이에 질서가 가능할 만큼의 간격이 있기에 우주는 파괴되지 않고 구조를 이룰수 있기 때문이다. 충돌하지 않을 정도의 거리, 어쩌면 의미라는 것은 이 ‘적당한 거리’ 가 있을 때에만 관찰된다. 인간은 이것과 저것 사이의 간격과 틈을 선으로 서로 이어가면서, 때론 그 선으로 경계를 구분하면서 형상을 발견하고 의미를 구성한다. 그러니까 별자리는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의식 안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음악을 들을 때도 유사한 일이 일어난다. 시간의 흐름 위에 지나간 음과, 현재의 음, 그리고 다가올 음에 대한 예측이 이어진다. 청자는 이 소리들을 하나하나를 듣기보다는, 그 사이의 관계를 읽는다. 음의 간격을 따라 내면에 선을 긋고, 구조를 상상한다. 그렇게해서 음악은 청자의 의식 안에서 의미를 갖는 하나의 미학적 사건이된다.

 

 선을 긋는다는 것은 연결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경계를 나누는 구분과 배제이기도 하다. 들을 만한 가치가 있는 소리와 그렇지 않은 소리 사이에 경계를 긋는 행위라는 의미에서 ’음악’이란 소리들 간의 정치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의 말을 빌리자면 이 선을 긋는 행위는 단지 개인의 기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와 문화 속에서 형성된 미학적 체계에 따라 작동하는 것이기도하다[2]. 한 가지 쉬운 예로, 거리의 악사를 떠올려 보자. 오고가는 인파 속에서 문득 익숙한 멜로디에 발걸음을 멈추어 선 경험이 한번 쯤은 있을 것이다. 연주자의 소리를 경청하기로 결정한 순간, 차도의 자동차의 소음이나 발자국 소리는 의식 안에서 자연스럽게 덜 중요한 소리로 배제되거나 주변부로 멀어진다.

 

 바흐의 바이올린 파르티타 3번 프렐류드는, 이런 청취의 구조를 섬세한 방식으로 드러내는작품이다. 빠르게 이어지는 음들의 단선율은 처음엔 하나의 흐름처럼 들린다. 그러나 청자는 곧, 그 안에서 서로 다른 층위를 구분하기 시작한다. 아래는 이 곡의 도입부 12마디의 악보이다.

 


J.S BACH  violon n°3 en mi majeur, BWV 1006
J.S BACH  violon n°3 en mi majeur, BWV 1006

3번째 마디부터 반복되는 B음은 지속음처럼 들리고, E장조의 음형은 독립된 멜로디로 감지된다. 이 때 청자가 인식하게 되는 청각적 형상을 다시 옮겨적어 본다면 아래와 같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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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대의 바이올린, 한 줄의 선율일 뿐이지만, 청자의 귀는 이를 수직으로 분할하고, 각각의 흐름에 역할을 부여한다. 악보에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소리들은 듣는 이의 인식 안에서 여러 층위로 분해되고 다시 재조직 되는 과정을 통해 음악적 의미가 구성되는 것이다. 반복되는 동일한 음은 배경처럼 들리고, 그 위를 선율이 가로지르며 떠오른다. 이처럼 청취는 단순히 듣는 것이 아니라, 들리는 것을 나누고, 선택하고, 조직하며 하나의 질서를 구성하는 행위다. 음과 음 사이의 간격, 그 흐름 안에서 반복되는 무엇, 사라진 것과 다가오는 것, 이 모든 것이 연결되어 하나의 미학적 총체로 구성되는 것이 음악이다. 그런 의미에서 음악학자 카를 달하우스가 ‘작곡은 연주됨으로 해체된다[3]’라고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음악도 하늘의 별자리처럼, 우리의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의식 안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별처럼 흩뿌려진 소리들 사이에서 나름의 선을 긋고, 형상을 상상하며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일. 때문에 청자는 단지 소리를 듣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동시에 선을 긋는 사람이며, 구조를 구성하는 창조자이다.



J.S Bach Violin Partita no.3 in E major, BWV 1005, I.Preludio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 연주


한편, 이러한 구조적 청취는 안톤 베베른의 피아노 변주곡 Op.27에서도 발견된다[4]. 이 곡에서는 의도적으로 배치된 쉼표와 음 사이의 간격들이 시간의 흐름보다는 음들 사이의 공간적 배치를 인식하게 만든다. 이는 청자가 선형적으로 서사를 따라가기보다는, 음들 사이의 점과 점을 조합해 시각적인 균형을 감각하도록 만든다.




Variations opus 27 de A.Webern
Variations opus 27 de A.Webern

 


Anton Webern : Variations Op27: Glenn Gould 연주

프랑스의 철학자 뒤프렌느는 음악이 하나의 완결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청자와 소리 사이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대화와 상호작용, 일종의 '담론'이라고 설명한다[5]. 각 음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결국 청자와 대화하는 관계 속에 있을 때다. 음악은 악보 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청자가 내면으로 ‘다시 쓰면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청자는 어떻게 이 ‘질서’를 구성할까? 다시 별자리를 찾는 일로 돌아가 보자.  '코스모스'에서 칼 세이건은 말한다. “현대인이 하늘을 바라보면 자전거나 냉장고, 로큰롤 스타의 얼굴을 찾아내어 별자리를 만들것이다".[6] 별들 사이에서 우리가 이미 경험했던 형상을 찾아내는 것 처럼, 청자는 자신이 속한 세계의 질서와 개인의 경험, 기억, 그리고 문화와 분리되지 않는 사회적 맥락 안에서 소리의 점들을 연결한다.


 과거에는 우리가 조성음악을 ‘자연스럽다’고 느끼는 것에 ‘조성’이 물리적 배음 구조와 일치하기 때문에 편안하게 들린다는 주장이 이론가들 사이에 있어왔다. 그러나 2016년 Nature 에 실린 McDermott 의 연구는 이 통념에 의문을 제기한다[7]. 서양 음악에 거의 노출되지 않은 아마존 원주민 청자들과, 미국 및 볼리비아 도시권 청자들을 비교해 협화음(consonance)과 불협화음(dissonance)에 대한 선호도를 조사한 연구 결과, 서양식 음악에 익숙한 청자들은 협화음을 선호했지만, 문화적 노출이 전무한 원주민들은 협화음과 불협화음 사이에 선호 차이를 거의 보이지 않은 것이다.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는 대상의 자연적인 성질에 속한 것이 아니다. 타고나기를 조화롭고 아름다운 것도 없고 본질적으로 불쾌한 것도 정해져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을 판단하는 감각이란 것은 사회 속에서 형성된 문화적 경험과 학습에 따라 얼마든 달라질수 있다. 결국은 익숙함이 곧 ‘자연스러움’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보편적으로 ‘좋다’고 느끼는 것들의 이유는 그것을 우리가 이미 알고 있고 익숙하여 질서를 만들기 쉽기 때문이다. 이 말은 우리가 어떻게 외부 세계를 경험하고 판단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단서가 된다.


낯선 언어, 다른 가치관과 세계를 만날 때, 우리가 두려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나의 질서로 그것을 재구성 할수 없을 것 같은 무력감일 수 있다.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은 배제하려는 습성이다. 그러나 아름다움을 찾는 사람은 우주 항해자처럼 그 막연한 두려움을 이겨내고 반짝이는 별과 같은 각각의 존재들을 있는 그대로 느껴보려 시도할 것이다. 그것은 곧, 다양한 존재 방식과 표현 양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미학적 윤리이자, 사회적 태도다.


그런 의미에서 작곡가 존 케이지의 음악 ‘거실음악 Living Room Music (1940)’ 과 같은 작품은 우리 주변의 다양하고 이질적인 소리들을 서로 연결하는 청취의 가능성을 확장시켜주는 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늘의 별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지만, 그것들을 어떤 선으로 이어가며 담론을 만들어 갈지는 세계와 자신을 인식하고 타인을 수용하는 우리의 태도에 달려있다. 그래서 어쩌면 구약성경의 창세기에서는 아래와 같은 기적을 말하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가 감각을 열고 두려움도 편견도 없이 미지의 세계를 바라볼 때,하늘의 별처럼 끝없이 다양한 삶을 새롭게 만나게 되는 기적의 가능성을 말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을 바라보아라. 셀 수 있으면 저 별들을 세어보아라. 네 자손들도 저 별들처럼 많아지게 될 것이다” (쉬운성경 창세기 15:5)

Improvisation 에밀리 김



[1] Sagan, C. (1980). Cosmos. New York: Random House.

[2] Rancière, J. (2000)., Le partage du sensible: Esthétique et politique (pp. 12-25). Paris: La Fabrique Éditions.

[3] Carl Dahlhaus, « Qu’est-ce que l’improvisation musicale ? », Tracés. Revue de Sciences humaines, 18 | 2010, 181-196.

[4] Adorno, T. W. (2009). Introduction à la sociologie de la musique (1‑). Éditions Contrechamps. https://doi.org/10.4000/books.contrechamps.921

[5] Dufrenne, M. (1973). The phenomenology of aesthetic experience.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p. 249

[6] Sagan, C. (1980). Cosmos. New York: Random House.

[7] McDermott JH, Schultz AF, Undurraga EA, Godoy RA. Indifference to dissonance in native Amazonians reveals cultural variation in music perception. Nature. 2016 J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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